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크루이프 (문단 편집)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경력 === 1966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데뷔한 크루이프는 곧 맹활약하여 주전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유럽 예선에서 탈락하여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다.[* 설성가상 라이벌인 [[프란츠 베켄바워|베켄바워]]의 서독은 대회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미헬스를 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크루이프를 비롯한 [[요한 네스켄스]], [[로프 렌센브링크]], [[뤼트 크롤]]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으고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토탈 풋볼]]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데 1차 조별리그 3조에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를 2:0으로 격파,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이랑 0:0 무승부,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불가리아]]를 4:1로 격파하여 2차 조별리그에 진출해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크루이프 본인이 멀티골을 넣는 등 4:0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사라진 팀#s-2|동독]]을 상대로 2:0,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을 상대로 네스켄스와 크루이프가 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며 결승까지 안착했다. 처음엔 원래 축구 변방이었던 네덜란드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본선에서 네덜란드가 [[토탈 풋볼]]로 눈부신 경기력을 선보이자 네덜란드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악수를 나누는 베켄바워와 크루이프 1.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악수를 나누는 베켄바워와 크루이프 2.jpg|width=100%]]}}} || || {{{#000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이었다. 서독 역시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2차 조별리그에서 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지만, 많은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승리를 점쳤다. 서독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동독전에서 의외의 졸전을 펼치며 패배를 당해 우승 후보라는 평가에 먹칠을 했고,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주적인 동독에게 무기력하게 패한 것에 분노한 서독 국민들에게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서독이 동독에게 패한 것은 2차 조별리그에서 유리한 B조에 속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서독은 동독에 패하면서 조 2위로 내려앉아 8강 조별리그에 폴란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B조가 되었다. 반면 네덜란드는 2차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동독과 같은 A조가 되었다. 덕분에 서독은 네덜란드에 비해 손쉽게 결승에 올라왔지만, 같은 3승으로 결승에 올랐다 하더라도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3승을 거둔 네덜란드가 서독보다 훨씬 큰 임팩트를 보인 것은 당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결승에서 네덜란드의 우승을 점쳤다. 크루이프의 킥오프로 결승전이 시작된 후 네덜란드는 그 유명한 16번의 볼터치로 경기 시작 1분 만에 [[페널티킥]]을 얻어 냈고 이를 [[요한 네스켄스]]가 마무리하며 예상대로 네덜란드가 손쉽게 우승컵을 가져가는 듯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74년 네덜란드가 [[토탈 풋볼]]로 유명해지기 직전,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은 바로 서독이었다. 서독은 [[UEFA 유로 1972|유로 1972]]에서 화려한 패싱 플레이를 펼치며, 잉글랜드(3:1), 소련(3:0) 등 다른 우승 후보들을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여 '람바참바 풋볼'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1972년 [[발롱도르]]에서 서독 선수들이 1~3위를 독식할 정도였다. 당시 서독의 화려한 플레이는 유럽팀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같이 아트사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격이라 당시 유럽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그러나 유로 1972 우승 이후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브라질과 같은 남미 강호들이 가세하는 월드컵에서 확실하게 우승을 거머쥐기 위해 대표팀의 색깔을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아트 사커로 맞불을 놓기보다 독일의 장기인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수비와 조직력 위주의 축구로 회귀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쇤 감독은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를 빼고 전사 [[볼프강 오베라트]]를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기용하는 등 대표팀의 색깔에 변화를 주었다. 허나 그 결과 1974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실리적이고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했고, 게다가 조별 본선에서 동독에게 패하면서 우승후보로서의 자존심을 구겼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은 화려한 토탈 풋볼을 구사하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강호들을 잇따라 무실점으로 격파하던 네덜란드에게 쏠렸다. 1974년 월드컵을 앞두고 서독의 쇤 감독이 잘나가던 서독 대표팀에서 화려함을 지우면서 팀 컬러를 바꾼 것은 브라질 같이 개인기가 뛰어난 강호를 상대로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가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서독의 이러한 전략은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입증되었다. 결승전에서 서독의 쇤 감독은 찰거머리같은 대인 방어 능력을 보유한 사냥개 [[베르티 포크츠]]를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다. 포크츠는 악착같이 크루이프를 봉쇄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전담 마크맨들을 농락하면서 활약해왔던 크루이프였지만, 포크츠는 여타의 마크맨들과는 달랐다. 결국 크루이프는 결승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1974년 월드컵에서 결승전 이전까지 단 1점만 실점할 정도로[* 그나마 1실점도 불가리아에게 4:1 대승을 거두는 와중에 내준 실점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 탄탄한 수비를 보였지만, 결승전에서는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몰아붙이는 서독의 파상 공세에 연이어 뚫리며 위기를 맞았다. 결국 네덜란드는 [[파울 브라이트너]]와 [[게르트 뮐러]]에게 연속골을 내주면서 1:2로 역전패,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다만 결승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해 [[프란츠 베켄바워]]는 국가대표로 월드컵 우승,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으로 [[분데스리가]]와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우승을 했지만 크루이프의 혁명적인 플레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베켄바워는 크루이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1974년 당시에는 리그, 챔스, 월드컵까지 모든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고도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기자에게 "'''내가 올해 도대체 뭘 더 했어야 발롱도르를 받을 수 있었냐'''"라고 되묻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크루이프가 월드컵에서는 역대급 퍼포먼스를 남겼지만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상은 다소 아쉬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참고로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골든볼을 크루이프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과 RSSSF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78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 다만, 크루이프는 당시 모든 언론사[* 키커, Tyc 스포츠, Dos 스포츠, 클라린, ESPN, 이콴지, 스포츠넷, 소파스코어, 캐스트롤]에서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으며 키커와 옵타에서 대회 평점에서 1위를 기록했다.[[https://www.historical-lineups.com/world-cups-1966-to-1986-best-players/european-qualifiers-and-final-tournament.html|#]] [[https://www.bigsoccer.com/threads/1974-world-cup-best-players.2026718/|#]] 1974년 준우승 이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독한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불참했는데, 독재자를 혐오한 크루이프의 성향상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에 반대해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가족 때문에 불참한 것이었다. 2008년 스페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괴한들에게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당해 생명이 위협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충격이 컸던 가족들을 내버려두면서까지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라고 30년 만에 고백했다. 어쨌건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없이도 결승까지 올랐지만 아르헨티나에게 패하고 만다.[* 크루이프가 자서전에서 언급하기를 만약 크루이프 자신이 1978년 월드컵에 참가했다면 자신이 그의 조국 네덜란드를 우승시켰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토탈 풋볼로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두 대회 연속 개최국에게 결승전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때 사령탑을 맡은 감독은 오스트리아 출신이자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인 [[에른스트 하펠]]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